22. 블루 클랜 (5)
약사는 휘파람을 불면서 방 안의 수납장에서 누런색 가루가 든 비닐봉지를 꺼냈다.
그러자 그걸 본 손님은 레이피어를 뽑아 들어 냅다 던졌다.
날아간 레이피어는 봉지를 쥔 약사의 손을 꼬챙이처럼 꿰뚫었다.
“크아아악!”
약사는 자신의 손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기 무섭게 손님이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손님은 한 손으로 약사의 입을,
다른 손으로 단검을 들어 약사의 목에 댔다.
“잘 들어. 한 번만 물을 거야.”
약사는 겁에 질려서 무어라 웅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입이 막혔다는 사실도 잊은 채 계속해서 지껄였다.
손님은 천천히 약사의 입을 막았던 손을 뗐다.
그러자 약사의 입에서 속사포로 말이 쏟아졌다.
“난 그저 돈만 받고 일해 준 것뿐이에요. 치안대에 아는 사람도 있어서 단속을 피할 수 있거든요. 다들 저한테 뇌물을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요. 40층 치안대에 부정부패가 많은 건 제 탓이 아니에요. 전 그냥 성실한…….”
“마약 파는 주제에, 성실하단 소리를 하냐?”
“제 탓이 아니에요. 여기 치안대원들은 다 블루 클랜한테 돈 받아먹었단 말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뭘 어쩔 수 있겠어요? 다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이라고요.”
약사의 목에서 단검이 떨어졌다.
그러나 약사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간,
그의 손에 박혀 있던 레이피어도 쑥 빠졌다.
“으아아악!”
손님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약사를 발로 차서 넘어뜨리며 그의 비명을 멎게 했다.
“으윽.”
“그래서…….”
손님은 쓰러진 약사의 머리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살짝 짓누르며 물었다.
“아지트가 어디야?”
“그, 그걸 말하면 제가…….”
손님은 발에 체중을 실었다.
“아아아악, 악, 악!”
“엄살 부리지 마. 사람 대가리는 그렇게 쉽게 안 깨져.”
약사는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머리를 짓누르는 사람은 분명 수도 없이 많은 살상을 벌인 극악무도한 살인마다.
발에 실리는 체중은 점점 늘어갔고, 약사는 흐느끼며 울었다.
“전 아무 잘못 없어요. 어차피 제가 팔지 않았어도 다른 누군가가 팔았을 거예요. 전 그냥 어쩔 수 없이 협조한 것뿐이에요.”
“알았으니까, 말해.”
약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말했다.
손님, 이건기는 그런 그를 비웃으며 그의 머리를 발로 찼다.
***
블루 클랜의 아지트.
“하아아암.”
문을 지키는 조직원들의 입에서 늘어지게 하품이 나왔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 탈락한 지원자 중 움직일 수 없는 중환자들을 공터에 버리고 온 참이었다.
“피곤하다. 그런데 그 의뢰인이란 놈은 무슨 미친놈이야?”
“그러게. 그 자식 때문에 우리 용병들까지 다 아작 났잖아. 도대체 큰형님은 얼마를 받은 거야?”
“큰 거 백 장 넘게 받았대. 그것도 여러 번.”
조직원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휴식을 취했다.
수십 명을 나른 탓에 그들은 몹시 지친 상태였다.
자고로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법.
벽에 기대어 앉은 그들은 하나둘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 덕분에 틈을 노리던 건기는 매우 손쉽게 아지트 안으로 잠입할 수 있었다.
몇 분 뒤.
“불! 불, 붙었어! 으아아악!”
미키는 불타는 건물 2층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몸은 유리 조각이 박히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유리 조각이 박힌 장작개비.
그는 자신의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바닥을 굴렀다.
구르면 구를수록 몸에 박힌 유리 조각이 더 깊게 상처를 파고들었다.
“크으으윽!”
불은 겨우겨우 껐지만,
이번엔 과다 출혈.
미키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건물을 뒤덮은 불은 출동한 소방대에 의해 빠르게 진압됐다.
건물 안쪽에 있는 비밀 통로.
다른 조직원들도 미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에 타 죽은 자.
연기에 질식한 자.
그리고 레이피어에 죽는 자.
클랜은 빠르게 붕괴했다.
이 모든 건 불과 몇 시간 전,
클랜 스스로 조직 내 실력자들을 이상한 의뢰에 참가시켜 쫓아낸 탓이었다.
“으아아악!”
조직원 하나가 가슴이 뚫린 채 뒤로 쓰러졌다.
정체불명의 가면 손님.
그와 마주친 조직원들은 모두 제대로 싸울 수조차 없었다.
다들 연기 때문에 질식하는 중.
게다가 좁은 통로에 많은 인원이 엮이는 통에 한 사람씩 차례대로 손님에게 당할 뿐이었다.
[근력이 올랐습니다.]
[순발력이 올랐습니다.]
[지구력이 올랐습니다.]
[등급이 올랐습니다.]
***
[등급 : B]
[근력 : D] [순발력 : D]
[지구력 : C] [지력 : B]
[스킬 : 리트라이]
***
블루 클랜은 스탯 향상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이, 이건 악몽이야. 그래, 이건 꿈이라고! 이게 진짜일 리 없어.”
블루 클랜의 보스.
리텐밍은 울상을 지으며 통로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야.”
이상하게 울리는 목소리.
건기의 부름에 리텐밍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리텐밍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전신에 부하들의 피가 묻은 건기를 쳐다봤다.
건기는 어느새 가면 대신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워, 원하는 게 뭐야? 돈이야? 모래가루? 얼마든지 줄게!”
“장부.”
의외의 요구.
리텐밍은 미간을 찌푸렸다.
“장부? 무슨 장부? 가계부?”
건기는 시답지 않은 농담의 대가로 리텐밍의 발목을 찔렀다.
송곳 같은 레이피어의 끝이 리텐밍의 발목을 관통했다.
“으아아악!”
리텐밍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서 몸부림쳤다.
그러자 건기는 한숨을 쉬면서 그의 배 위에 발을 올렸다.
“대답 안 할 때마다 한 번씩 찔러 줄 거야. 명심해.”
“자, 잠깐! 장부라고? 무, 무슨 장부? 설마 우리 장부를 다 달라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지.”
건기는 레이피어로 리텐밍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옐로우 클랜으로 올리는 상납금 장부. 그거 내놔.”
“그, 그건 안 돼! 그것만큼은 안 돼! 그걸 넘기면…….”
푹.
건기는 즉시 리텐밍의 다른 발목을 찔렀다.
그러나 이번엔 리텐밍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냥 죽여! 아무리 날 고문해도 그건 넘겨줄 수 없어. 날 죽이면 내 인벤토리에 넣어 둔 장부들도 모두 사라질 거야. 헤헤헤! 죽여!”
건기는 혀를 차면서 리텐밍의 머리를 걷어차 그를 기절시켰다.
그리고 밧줄로 그를 묶어서 질질 끌었다.
통로 밖은 뿌연 연기와 불을 끄기 위해 쏟아지는 물줄기로 엉망이었다.
그러나 그런 아수라장이야말로 빠져나가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모두의 이목이 건물에만 집중된 상황에서 건기는 마치 자기가 리텐밍을 구조한 양 떠들었다.
“비켜요! 비켜! 위급 환자입니다.”
건기는 병원으로 데려가는 척,
현장을 벗어났다.
그러고는 중간에 꺾어서 잽싸게 숙소로 향해 태구, 윌리와 합류한 다음 다 함께 치안대로 갔다.
40층 치안대,
현상 수배 부서.
평온하던 이곳이 발칵 뒤집혔다.
블루 클랜 보스의 체포.
40층 층대장은 고민에 빠졌다.
평소 리텐밍에게 뇌물을 받던 입장으로서 그를 처벌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층대장은 세 사람을 살폈다.
한 명은 이건기.
한 명은 주정뱅이.
한 명은 어린애.
그는 너스레를 떨면서 일단 박수를 쳤다.
“아이고! 고생 많으셨어. 여기서부턴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요. 어디 보자, 리텐밍의 현상금이…….”
리텐밍의 현상금은 천만 원.
층대장은 일단 이 셋을 보낸 후, 자신의 선에서 사건을 축소시켜 리텐밍을 풀어 줄 생각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상부상조였다.
“리텐밍의 대한 처벌은 어떻게 되는 거죠?”
건기의 질문에 층대장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우선, 조사를 철저히 한 뒤에 엄히 처벌할 거요.”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화법.
건기는 코웃음을 쳤다.
“조사를 철저히 한다고요?”
“그렇지. 법을 수호하는 치안대로서 법적 절차에 따라야지. 안 그렇겠습니까요?”
약 올리는 말투.
건기는 입술을 비틀며 하나만 더 물었다.
“그럼 무죄가 나올 가능성도 있겠네요?”
층대장은 가면 뒤로 보이는 눈빛을 보며 침을 한 번 삼켰다.
“기회는 모두에게 평등한 것 아니겠습니까?”
“기회? 평등?”
“범죄자라고 해서 무조건 유죄를 확정 지을 순 없죠. 증거가 없다면, 눈물을 머금고 풀어 줘야죠.”
원칙대로라면 현상 수배범은 생포되면 재판을 받게 된다.
그 후 재판 결과에 따라 처우가 결정되는데, 큰 이변이 없는 한 사형인 경우가 많다.
리텐밍은 마약 조직을 이끌고 있는 클랜의 보스.
누가 봐도 사형감이다.
그런데도 층대장은 어떻게든 그를 풀어 주려 애쓰는 중이었다.
그래야 돈이 되니까.
건기는 옆에 선 태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태구는 즉시 인벤토리에서 마총을 꺼내 그에게 넘겼다.
“지금 무슨……!”
팡.
층대장은 기겁했다.
건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가 보는 앞에서 리텐밍을 쏴 죽이고 말았다.
리텐밍의 이마 한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불투명한 진액이 뚝뚝 떨어졌다.
“이, 이게 뭔 짓거리야!”
층대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건기는 그가 한 것처럼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현상 수배범은 죽이든, 살리든 상관없잖아요? 어쩔 건데요? 죽은 놈하고 계속 친구하실 거예요?”
간단 명료.
층대장은 한숨을 푹 쉬면서 그냥 방을 나가 버렸다.
결국 남아 있던 대원 하나가 리텐밍의 현상금을 지급했다.
건기는 그 뒤,
통행 발급 부서로 갔다.
하지만 상층 통행 심사는 불합격.
층대장의 소심한 복수였다.
“죄송합니다.”
상담원이 건기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건기는 손사래를 치면서 웃었다.
“괜찮아요. 방법은 많거든요.”
임시 통행증이 있기에 딱히 절실한 것은 아니었다.
건기 일행은 거주 구역을 나와 황야에 있는 검문소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 설치된 검문소를 통과해 계단탑을 올랐다.
“후우.”
건기는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인벤토리를 열어 가면을 넣는 대신, 장부 하나를 꺼냈다.
“아저씨, 수고하셨어요.”
“햐햐햐햐! 간만에 칭찬받았다!”
태구는 좋다고 웃었다.
건기는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고는 계단탑을 오르는 동안,
느긋하게 장부를 읽었다.
그러는 사이,
일행은 41층에 도착했다.
***
42층 ‘브라운타운’의 고급 주점.
브라운 클랜의 조직원들이 거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돈, 술, 음악, 마약, 성.
짐승 같은 욕망과
알코올같이 가벼운 진심.
다들 헤프고, 또 헤프게 시간을 보냈다.
2층부터 60층까지인 굴뚝.
그 중에서도 41층부터 60층은
일명 ‘마굴’이라 불리며 각 클랜의 본거지가 있었다.
즉, 42층은 브라운 클랜의 영역.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3대 세력 간 암묵적인 합의에 있었다.
모든 층에 있는 거주 구역.
그것은 단순히 안전한 거주지인 것과 동시에 상층부로 이어지는 공급 라인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길드나 클랜에서 층을 장악하더라도 거주 구역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거주 구역을 건드리는 순간,
MGF에서 전력을 다해 공격해 오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거주 구역’만큼은 MGF의 절대적인 고유재산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거주 구역 외 황야는 자유.
덕분에 클랜이 자체적으로 마을을 짓는 경우도 있었다.
브라운타운도 그 중 하나였다.
“보스. 그 얘기 들으셨습니까?”
“무슨 이야기?”
브라운 클랜의 보스, 데미언.
그는 오른팔인 차지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태는 며칠 전 부하에게 들은 어느 현상금 사냥꾼의 일을 말했다.
“정말? 놈이 혼자서 블루 클랜을 다 작살냈다고?”
“보스는 목이 잘렸고, 2인자인 미키도 중상이라고 합니다. 클랜 조직원들은 절반 이상 죽었고요.”
“거기 애들은 원래 싸움하곤 담을 쌓았지. 그래도 돈은 많아서 용병이 빵빵할 텐데?”
“무슨 이유에선지 용병들끼리 싸움을 시켰대요. 그래서 죄다 병원으로 실려 가고 남은 건 송사리뿐인데, 하필 그날 이건기가 쳐들어온 거죠.”
“타이밍 한번 끝내주네. 그나저나 리텐밍 그놈은 왜 그런 미친 짓을 한 거야?”
절레절레.
데미언은 고개를 저었다.
리텐밍의 블루 클랜이 옐로우 클랜 산하라면, 그의 브라운 클랜은 화이트 클랜의 산하.
그래서 그는 블루 클랜의 일이 남일 같지 않았다.
개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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