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부터 아이딘에게 있는 신경질 없는 신경질을 다 부렸었다. 그런 그녀의 투정을 아이딘은 아무 불평 없이 받아 주었다. 그리고 그날, 어쩔 수 없이 아이딘의 약혼녀를 만나기로 했지만 예리엘은 역시 괜한 심술이 났다. 그래서 금방 끝날 총기 배달을 질질 끌기로 했다. 그럼 적어도 약속시간에 늦어 오빠의 약혼녀를 골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밖에서 때우고는 건스미스 원샷원킬로 돌아오는 순간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널브러진 시체들과 곳곳에 뿌려진 혈흔들.
예리엘은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가게로 뛰어 들어갔다.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시큼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가슴이 철컹 내려앉았다.
“오빠. 아이딘 오빠!”
예리엘이 소리쳤다.
“예리엘.”
가게 귀퉁이에서 피를 흘리는 아이딘을 예리엘이 발견했다. 예리엘이 한걸음에 달려간다.
“오빠 괜찮아?”
“어. 괜찮고말고…….”
타아앙.
아이딘이 쥐고 있던 총이 불을 뿜었다.
“끼아악.”
예리엘이 소리침과 동시에 예리엘 뒤를 따라온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피를 뿜으며 쓰러진다.
“예리엘, 어서 도망가.”
“오빠. 오빠는 어떡하고.”
“나는 괜찮아. 곧 군인들이 올 거야.”
아이딘이 쿨럭하고 피를 토해 낸다.
“아니야. 오빠, 내가 지켜 줄게. 여기 기다려 봐.”
예리엘은 작업대로 뛰어가 총을 하나 잡아 든다. 그리고 정신없이 총알을 찾기 시작한다. 그렇게 흔하던 총알들이 이날따라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뒤져서 간신히 총알을 찾아 탄창에 넣어 장전을 한 순간이었다.
타앙, 타앙.
연이은 총소리가 들린다. 예리엘이 총을 들고 바깥으로 나온 순간 괴물과 눈이 마주친다.
그 눈빛은 평생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휑한 얼굴, 움푹 파인 두 눈가에 총기 없는 눈동자. 싸늘한 미소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녀석이 서서히 다가온다.
“허어억!”
예리엘이 잠에서 깨어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또다시 악몽을 꾼 것이다.
내일 새벽부터 일이 있어 일찍 잠자리를 청했는데 뜸했던 악몽이 불현듯 또다시 찾아와 예리엘을 괴롭혔다. 시계를 보니 자리에 누운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이미 예리엘의 몸은 땀에 푹 젖어 있었다.
“싫어…….”
겁에 질린 그녀의 눈에는 희미하게 눈물이 맺혀 있었다. 얼마간 악몽 따위는 싹 잊고 지냈는데 페이 언니가 괜한 말을 해서 또다시 잠자리가 뒤숭숭해진 것만 같아 그녀가 마냥 원망스러울 뿐이다. 이렇게 악몽을 꾼 날은 절대 혼자서 잠들지 못한다. 예리엘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리를 뒤척였다.
‘뭐라도 해야 할 텐데…… 페이 언니한테 가야 하려나……?’
어느덧 예리엘은 침대 한편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자신도 모르게 훌쩍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결심이라도 한 듯이 방문을 열고 나섰다. 그리고는 창고 앞에 다가서더니 한참을 망설이다 박스 위에 있는 열쇠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자물쇠를 열었다.
철컥. 철그렁.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렸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예리엘은 혹시나 아이딘이 깨지는 않았을까 창고 안의 동태를 살폈지만 깊은 잠에 빠져들었는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창고 앞에 잠시 서 있다 자신의 방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창고 안에서 아이딘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꿈꿔, 예리엘.”
“어…… 그래. 아이딘도 좋은 꿈꿔.”
예리엘도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는 부리나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이딘.’
‘예리엘.’
자리에 누운 예리엘과 생각에 빠져 잠 못 이루고 있던 아이딘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서로의 이름을 되뇌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그렇게 서로의 이름을 되뇌며 잠에 빠져 들어갔다.
그날 밤 왠지 모르게 그 둘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 * *
쾅쾅쾅!
“아이딘! 아이딘!”
“아이딘! 큰일이야!”
두 덩치 녀석이 이제 막 해가 뜨려 하는 새벽녘부터 원샷의 문을 부서져라 두들기며 소리쳤다.
“둘 다 아직 자는 모양인데.”
“에잇, 그럼 어쩔 수 없지. 잭슨 형, 부수고 들어가자!”
“그래.”
“셋 하면 들이박는 거다!”
“오케이!”
“하나! 둘! 세에에엣!”
두 덩치가 힘껏 문을 들이박으려는 순간 원샷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자 열린 문 너머로 달려오던 두 덩치가 무게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쿠당탕!
“으악!”
“켁!”
아이딘이 두 덩치를 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물었다.
“아침부터 무슨 난리야?”
“크, 큰일 났어!”
꽤나 아플 만도 한데 두 덩치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몸을 탁탁 털며 일어나 대답한다.
“무슨 큰일?”
“마을에 그, 저…… 에…….”
호퍼가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자 잭슨이 도와주었다.
“괴물 같은 녀석이 나타났어!”
“맞아, 맞아. 괴물 같은이 아니고 괴물이야, 괴물!”
두 덩치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하지만 아이딘이 보기엔 지금 이 눈앞에서 정신없이 날뛰는 두 녀석이 더 괴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근차근 알아듣게 좀 말해 봐. 뭐라는 거야? 괴물이라니?”
“모르겠어. 빨리 도망가야 해.”
“그래! 벌써 마을 사람 여러 명이 그놈한테 당했어!”
“이전의 뮤턴트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니까!”
대재앙 이후 돌연변이를 일으킨 동물들이-그중에 사람도 있긴 하지만- 가끔 사람을 습격하거나 마을에 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었다.
“그냥 빨리 도망가는 게 상책이야. 경비대가 올 때까지 말이야. 이쪽으로 올지도 모르니까!”
“어서 빨리. 지금 바로 도망쳐야 한다니까, 아이딘!”
“그래, 알았어. 예리엘! 어서 나와 봐!”
아이딘이 예리엘을 찾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아이딘이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 샌드위치 10개가 냉장고의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운터 앞 의뢰판을 보니 경비대의 중기관총을 수리하러 간다는 예리엘의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 괴물 같은 녀석은 어디에 있는데?”
“북문 쪽으로 들어왔다는데.”
아이딘의 머릿속에 북문 쪽에 있는 경비대가 떠올랐다. 아마 공교롭게도 지금 시간이라면 예리엘이 일을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다.
“거기 좀 가 봐야겠어.”
“무슨 소리야? 빨리 도망치는 게 급선무야. 일단 도망치고 나머지는 경비대 녀석들한테 맡기는 게 나아!”
“아니야. 내가 가 봐야 할 것 같아.”
아이딘이 딱 잘라 말한다.
“왜 그러는데?”
“예리엘이 그 괴물 같은 녀석과 만날 것 같아.”
“뭐라고…….”
두 덩치의 놀란 표정을 등 뒤로 하고 아이딘은 원샷을 재빨리 박차고 나선다.
* * *
예리엘에게 오늘은 무척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새벽부터 또 고장이 나 버린 경비대의 중기관총을 손보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일이 끝나자마자 수리비를 지급해 준 것이다. 더욱이 두 번이나 밀려 있던 수리비까지 함께 지급해 주다니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주머니가 두둑하니 발걸음도 가볍다. 오늘은 아이딘과 그리고 아직까지는 못 미더운 두 덩치와 함께 조촐한 파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그들과 함께하면서 일도 더 많이 할 수 있었고 이런 뜻밖의 행운(?)도 생겼으니 말이다. 예리엘은 신이 나서 콧노래까지 부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을 북문을 지나는 순간 예리엘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아무리 이른 아침이라 해도 이렇게 마을이 조용할 리 만무했다. 마을 북문 쪽은 상업지구와 가까워 늘 사람이 붐볐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한산하다 못해 음산한 기운까지 들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마을로 들어서는데 예리엘의 발에 차이는 것이 있었다.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자칫 지나칠 뻔했지만 그것은 분명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꺄야아아.”
예리엘이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한달음에 마을 안쪽을 향해 뛰었다. 곳곳에 널브러진 사람의 시체가 보였지만 겁에 질려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저 정신없이 뛸 뿐이었다.
그렇게 마을 쪽으로 한참을 뛰고 나니 너무 숨이 차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사람 하나가 서서히 걸어오고 있었다. 예리엘은 다행이다 싶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으나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심장이 멎어 버릴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무서워…….”
예리엘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수없이 꿈속에 나타나 자신을 괴롭히던 그 괴물이 눈앞의 현실로 나타났다는 사실에 오싹했다. 정말이지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놈은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좀 전까지는 누군가의 손가락으로 존재했을 뼈마디 하나를 질겅질겅 씹으며 예리엘에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휑한 얼굴, 움푹 파인 두 눈가에 총기 없는 눈동자.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4년 전 오빠를 해쳤던 그 괴물임이 분명했다. 매일 악몽에 시달릴 때마다 나타났던 그 얼굴을 결코 잊을 리가 없었다.
예리엘은 공포에 질려 도망가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예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괴물과 그녀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예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공구함에 있던 권총으로 손이 갔다. 아이딘에게 빼앗아 숨겨 놓았던 독수리 문양의 권총이 생각났던 터였다.
예리엘은 주섬주섬 공구함 밑바닥에 있는 권총을 들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괴물을 겨누었다.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두려움에 연이어 방아쇠를 당겨 보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 맞아…… 안전장치!”
예리엘은 예전에 아이딘이 가르쳐 준 디코킹 레버를 올리고 방아쇠를 당긴다.
타아앙.
총소리와 함께 예리엘이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한다. 괴물 역시 요란한 총소리에 잠깐 멈칫하더니 더 빠른 속도로 예리엘을 향해 달려온다.
탕. 탕. 탕.
예리엘이 연이어 총을 쏘지만 괴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올 뿐이다. 30미터, 20미터, 10미터.
괴물의 얼굴, 괴물의 생기 없는 눈동자가 마치 예리엘을 집어삼킬 듯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예리엘은 공포에 질려 두 눈을 감아 버리고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탕. 탕.
연이은 총성이 울려 퍼지고 예리엘은 누군가 자신의 등 뒤에서 자신의 손을 빠르게 감싸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탕! 또 한 발의 총성과 함께 ‘크윽’ 하는 단말마가 들려왔다.
예리엘이 조심스럽게 눈을 떠 보니 괴물은 불과 2미터도 안 되는 지점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그리고 어느 샌가 아이딘이 등 뒤에서 예리엘을 안은 채 그녀의 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아이딘의 거친 심장소리가 등으로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예리엘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이 ‘고마워. 아이딘 오빠.’라고 속삭였지만 아이딘은 자신의 거친 호흡에 듣질 못했다.
“괜찮아?”
“응.”
예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인다.
아이딘은 권총을 쥐고는 괴물에게 다가선다. 괴물은 가슴에 총을 맞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흉골 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음에도 불구하고 즉사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아이딘은 깜짝 놀란다. 이 괴물의 복장이 몇 주 전 자신이 입고 있었던 것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아이딘은 한쪽 무릎을 꿇고 괴물에게 다급하게 묻는다.
“넌 누구야? 대체 정체가 뭐야?”
강성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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