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료가 너무 비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아직 급료도 안 정해졌고.”
“그러게. 보름은 두고 본다고 하셨으니까……. 그래도 얼마 안 남았잖아. 티노는 정말 부지런하게 잘 하니까 많이 받을 수 있을 거야! 시문 님은 인색하지 않으시거든.”
시문에 대해서라면 이성을 살짝 잃어버리는 라디라서 믿음은 안 갔다. 게다가 여태껏 시문이 공방을 둘러보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대체 뭘 어떻게 보고 판단해서 티노의 급료를 정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문의 열렬한 팬인 라디에게 그 의문을 털어놓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웨이 선배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다른 공방이었으면 쫓겨나도 한참 전에 쫓겨났을 걸?”
라디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지극히 옳은 말인지라 티노는 키득키득 웃었다.
어느 정도 달리자 라디는 곧 웨이에 대한 것은 잊어버리고 핀 학원에 가는 일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예 학원을 가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 거긴 어떤 걸 알려 줄까? 무기는 자기가 사야 되는 걸까, 학원 것으로 연습하는 걸까?”
마치 소풍가는 아이처럼 들떠 있는 라디의 모습에 티노가 제의했다.
“라디도 같이 배워 볼래?”
“아니야. 난 움직이는 건 별로 안 좋아하거든. 기초 군사 훈련 때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런 것치곤 공방에선 잘만 움직이던데?”
“싸우거나 단련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게 싫다고. 구경하는 건 좋지만.”
“아, 그거.”
“티노는 그런 거 좋아하는 거지?”
“몸을 움직이는 건 대체로 다 좋아해.”
램의 엑시아를 타고 듀오 루나까지 뻔질나게 오갔던 티노가 아니던가? 가만히 있을 때 정서불안이 되어 안절부절못하는 일은 없지만, 움직일 때가 몇 배는 더 활기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럼 싸움 잘해?”
“글쎄…….”
“골목대장이었다거나?”
라디가 장난스럽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시골에서 왔다고 티노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작은 시골마을에 대한 선입견은 있었다. 이를 테면 맨발로 뛰놀다 시냇물에 멱을 감는 흙투성이 아이들 말이다. 그렇다고 티노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것도 아니지만.
“골목대장은 빌이었지.”
허풍이 심하고 거만하고 걸핏하면 티노를 걸고넘어졌지만 함부로 힘자랑하지 않고 안전지대에서 아이들을 잘 데리고 놀았던 녀석이었다. 어려서부터 훈련을 받은 덕에 기초 군사 훈련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지만 머리 쓰는 것이 약해서 아직 통과는 못 했다. 티노가 먼저 합격하고 나갔을 때 분해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참 고소했었지.
“티노는?”
“난 마음 맞는 친구 한 명이랑 조용히 놀았어.”
그 친구는 물론 아르카다. 초죽음이 될 때까지 훈련받는다거나, 복합형 몬스터를 사냥한다거나, 몬스터의 기계 부위를 온전히 분해해 보려고 애쓴다거나, 직접 기계를 조립해 본다거나, 그러다 실험실을 몇 번 부숴 먹었다거나, 만약의 경우를 위한 다음 은신처를 찾아 듀오 루나 북부를 뒤진다거나 등등. ……썩 조용히 논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 띈 적은 없으니까 그런 셈 쳐도 될 것이다.
마을 아이들은 티노를 따라 안전지대 밖까지 놀러 나가고 싶어 했지만 티노는 늘 혼자 움직였다. 다른 아이들을 끌어들이는 순간 자신의 자유로운 외출도 끝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티노를 얄미워하면서도 어려워했다. 그러고 보면 어쨌거나 티노에게 거침없이 시비를 걸었던 아이는 빌뿐이었다.
“의외네? 티노는 친구가 많을 것 같은데. 둘이서만 놀았다면 여기 올 때 친구가 무지 섭섭해했겠다.”
“글쎄, 과연 그럴지…….”
친위대원이 되어서 돌아오겠다는 티노에게 운이 좋으면 죽기 전엔 볼 수 있겠다고 답했던 냉담한 목소리가 떠오른다.
“아니, 그럴 리 없지. 그런 섬세한 녀석이 아니야!”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 티노를 보며 라디는 까르륵 웃었다. 플로레스라인 아르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위험하기 때문에 말을 돌릴 겸 티노가 먼저 질문했다.
“라디는 왜 원석 가공 공방에 들어간 거야?”
“몇 년 전에 원석 가공 공방들이 합동 전시회를 연 적이 있어. 그때 시문 님의 작품을 보고 완전히 반해 버렸지.”
라디는 상기된 얼굴로 티노를 바라보았다.
“정말 감동적인 작품이었거든.”
“그래?”
하루에 한 번 얼굴 보는 것도 힘든 공방 주인을 떠올리며 티노는 의외라 생각했다. 몇 년 전이라면 그는 20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한 사람의 혼을 빼 놓을 만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한가? 타고난 감각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감각을 완벽하게 살릴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만 가능할 텐데.
못 믿겠다는 기색인 티노를 보고 라디는 발끈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시문 님은 원석 가공에 있어선 둘째가라면 서러울 천재라고!”
티노는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원석 가공 공방 자체가 비주류인데 거기 기술자를 어떻게 알겠는가?
“아우우! 직접 보여 주면 좋을 텐데……!”
라디는 답답한 듯 한 손으로 가슴을 퉁퉁 쳤다.
“그럼 나중에 공방 가서 보여 주면 되겠네.”
“시문 님의 작품은 왕실에 진상되거나 경매로 붙여지기 때문에 공방에 남아 있는 건 없어. 시문 님 공방에 들어오면 시문 님 작품을 실컷 보게 될 줄 알았다가 얼마나 실망했는데.”
“오, 그래? 정말 대단한가 보네?”
티노는 진심으로 놀랐다. 왕실에 진상되는 것보다도 경매에 붙여지는 게 놀라웠다. 보통 세공품들은 주문제작을 하지, 제작자가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든 뒤에 파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이제야 티노의 반응이 성에 찬 라디는 가슴을 쭉 내밀며 득의양양해했다.
“당연하지! 시문 님은 세 명밖에 없는 원석 가공 장인이란 말이야!”
“장인이었어?”
“……몰랐단 말이야?”
라디는 가슴에 잔뜩 넣었던 바람을 빼며 어이없다는 얼굴로 티노를 보았다. 그런 라디를 티노 역시 똑같은 얼굴로 마주보았다.
“알 턱이 있냐?”
“테이슨 경이 말해 줬을 줄 알았지.”
“아는 분이 운영하는 공방이라고만 했어.”
“그래? 네가 친위대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니까 말할 필요를 못 느끼신 건가?”
“그럴지도 모…….”
티노는 말하다 말고 문득 뱅커를 멈췄다. 기묘한 적막감이 들었다. 각종 승용물이 오가는 소리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도 그대로인데 무언가가 조용해진 느낌이었다. 그러다 어딘가에서 짜증 섞인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기점으로 사방이 시끄러워졌다.
티노를 따라서 멈췄던 라디가 말했다. 이상을 감지한 것은 티노가 빨랐지만 상황을 파악한 것은 그녀가 빨랐다.
“또 씨드가 끊겼나 보네.”
“아하! 그거였군.”
그 기묘한 적막감은 대형 어스듐으로 움직이는 생활 도구들이 멈춤으로써 생긴 것이었다. 사람들의 고함소리엔 여러 가지 피해사항이 담겨 있었다. 제일 먼저 고함을 질렀던 사람은 샤워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씨드가 끊기면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 아직 겨울은 아니지만 충분히 쌀쌀한 날씨에 난데없이 찬물을 뒤집어쓰면 성질이 날 수밖에 없다. 어떤 집은 늦은 점심을 먹으려던 모양이다. 불이 나오지 않아서 화가 난 것 같다. 옆의 빵집에선 난리가 났다. 온도에 예민한 스펀지케이크를 굽고 있던 중이었나 보다. 바로 씨드가 들어오지 않으면 지금 오븐에 돌리고 있는 것들은 죄다 버리게 생겼다.
“저쪽은 괜찮은가 본데?”
티노는 대로 너머를 가리키며 물었다.
“도시 전체의 씨드가 끊기는 일은 없어. 끊기는 구역도 좁은 편이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거든. 그래서 나라에서 늑장 대응하는 거라고 불만이 많더라고.”
“흐음…….”
티노는 오븐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빵집 주인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라디에게 물었다.
“전쟁 이후부터 이렇게 됐다고?”
“응. 어스듐 라인 어딘가가 잘못된 거라더라. 근데 어느 한 구역만 그러는 게 아니라 수도 전체가 그래서 대대적으로 점검해야 한대. 시간도 돈도 많이 들어서 미루고 있는 거라고 하더라고.”
“흐음.”
좀 전과 비슷한 감탄사지만 섞여 있는 색깔은 달랐다. 이번 것은 경쾌하면서 장난기가 느껴졌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옛날 생각나서.”
“옛날?”
라디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티노를 봤다. 티노는 일부러 먼 시선으로 저편을 보며 아련하게 독백하는 척했다.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지.”
“얼씨구?”
라디의 얼굴이 점점 더 황당하게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수도는 어디라 할 것 없이 수리와 복원, 재건축 등을 위한 공사로 어수선했다. 곳곳에 건설용 중장비들이 있었고 흙과 나무, 벽돌 등이 쌓여 있었다. 다음 목적지인 어스듐 교환소는 하필이면 공사장 옆에 있었다. 거기다 잔뜩 쌓인 목자재가 길의 대부분을 막고 있어서 억지로 연결한 수레를 단 채로 지나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한 명이 뱅커를 맡고 한 명이 교환소를 갔다 오기로 했다.
도둑맞을 위험이 거의 없는 원석보다는 공방의 귀한 승용물인 뱅커 쪽이 더 중요했기에 무장한 티노가 뱅커를 맡고 있기로 했다. 가서 말을 하면 직원이 원석을 날라 줄 테니 교환소는 라디가 가도 상관없었다. 뱅커의 시동은 일단 끄고 열쇠는 라디가 가지고 가기로 했다.
라디가 길을 막고 있는 목자재를 우회해서 교환소 쪽으로 사라진 뒤, 남겨진 티노는 한가로이 수레에 기대어 섰다. 그리고 공사장 건너편의 좁은 골목길을 의미 없이 바라보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무예 학원을 가서 수준을 높인다 해도 그것만으로 친위대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친위대에 들어가기 위한 현실적인 요건은 제쳐 두더라도 책자에 적힌 왕실 예법과 교양, 학식 등은 반드시 갖춰야만 한다. 티노는 그런 것을 어디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핀 학원이 수업료가 얼마일지, 수업 수준이 어떨지도 모른다. 급료를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티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핀 학원에 대한 것은 오늘 가서 보고 물어보면 된다. 어차피 당장은 돈이 없으니 학원에 등록하는 건 나중이 될 것이다. 급료에 대한 건 늦어도 이번 주 내로 정해질 테고, 왕실 예법 등에 대한 건 테이슨에게 물어보면 된다. 어디서 배울 수 있는지, 독학은 가능한지 정도는 알려 줄 것이다. 조만간 티노를 보러 오겠다고 한 말은 빈말이더라도 어차피 공방에는 종종 오는 모양이니까.
결국 당장 티노가 할 수 있는 건 부지런히 일해서 돈을 모으며 때를 기다리는 것뿐인 셈이다. 그렇게 실속 없이 복잡했던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티노는 기지개를 쭉 폈다. 그때였다.
“……치지 마라!”
“……잡아!”
“까악!”
목자재 너머에서 점점 크게 들려오는 소리에 티노는 위로 쭉 폈던 손을 내리고 목자재 쪽을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작은 언덕처럼 쌓여 있는 목자재의 꼭대기에 한 남자가 사뿐히 뛰어올라 착지했다. 그는 이미 가동 중인 백팩을 멘 채 총을 들고 있었다. 검집은 있으나 검은 없었고, 곳곳이 찢어진 시꺼먼 옷 틈새로 두툼한 갈색 근육과 상처가 보였다. 피를 흘리고는 있었지만 살짝 베인 정도였다.
남자가 목자재 위에 서 있었던 것은 아주 짧은 순간으로, 곧바로 목자재를 딛고 다시 뛰어올랐다. 상당한 높이로 쌓여 있는 목자재 위에 가볍게 착지했던 것을 보아 백팩의 이동밸브는 이미 열려져 있는 것으로 보였다.
탕!
남자가 허공에 떠오른 순간 그의 뒤에서 총성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등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그의 몸이 허공에서 어중간하게 기우뚱하면서 그대로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균형을 잡아서 착지한 그의 등에서 흐릿하게 연기가 나고 있었다. 백팩에 맞은 걸까?
남자는 이를 꽉 물며 달리기 시작했다. 자연히 방향은 티노가 있는 쪽이 되었다. 그가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도 모르는데 공연히 참견하고 싶지 않아서 티노는 무기 자체를 뽑지 않았다. 도주로 중간에 있는 티노가 무기를 들면 남자는 자연히 티노와 대치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티노의 마음도 몰라주고 남자는 대뜸 티노에게 총을 겨눴다. 그리곤 그대로 달려들어 굵은 팔뚝으로 티노의 목을 조이고 이마에 총을 갖다 댔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을 보았나! 이럴 줄 알았으면 보자마자 쏴 줬을 것이다!
“꼼짝 마! 다가오면 이 꼬마의 머리를 날려 버리겠어!”
어이없게 당한 것이 분했지만 티노는 우선 착실하게 인질 노릇을 하기로 했다. 막 남자를 추적하여 목자재 위로 모습을 드러낸 병사들이 그 협박에 우선 멈춰 섰다.
“아이를 인질로 삼다니! 부끄럽지도 않냐!”
“전혀! 난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
당당하게 선언한 남자는 비열하게 웃으며 티노의 목을 조인 채로 팔뚝을 위로 올렸다. 자연히 숨이 막혀 와 티노는 남자의 팔뚝에 한 손을 얹어서 힘주어 매달려 압박을 줄였다. 티노의 무게가 얼마 안 나가서인지, 상황이 급하여 눈치 채지 못하는 건지 남자는 총을 더욱 위협적으로 들이대며 외쳤다.
“당장 목재 너머로 돌아가라! 설마 고귀한 디나르 가의 자랑스러운 사병 나으리들께서 천박한 현상수배범과 똑같이 인명을 함부로 여기진 않겠지?”
병사들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남자가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서 디나르 가를 언급한 이상 그의 말대로 인질을 무시하는 행동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자칫하면 디나르 가가 모든 비난을 뒤집어쓸 수 있기 때문이다.
신승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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