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남자가 움찔하며 몸을 반쯤 돌려서 뒤를 경계했다. 어느 틈엔가 뒤에도 병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넌 포위됐다! 포기하고 아이를 놓아줘라!”
“흥! 꼬마의 목숨이 걱정되면 너희부터 물러나!”
남자는 목청 크게 협박하면서 천천히 몸을 뒤로 뺐다. 아까 티노가 보고 있던 좁은 골목길 쪽이었다. 병사들도 그걸 알아차리고 간격을 유지하며 다가왔다. 이대로 가면 끝이 없을 것 같다.
티노는 남자의 팔뚝에 매달려 호흡을 확보하면서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살아남는 법’에 가까웠던 아르카의 훈련 덕에 그는 어느 순간이든 머리 한쪽은 냉정하게 계산할 줄 알았다. 왜 그는 티노를 인질로 삼았을까? 처음엔 분명 그냥 도망가려 했었다. 그래서 티노도 방심하다 이 꼴이 된 것이다. 갑자기 계획을 변경한 이유가 뭘까?
티노는 좀 전에 남자가 총에 맞고 떨어진 장면을 떠올렸다. 백팩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그렇군. 백팩이 고장 난 거다. 착지 후 달리고 나서야 그걸 깨달았겠지. 백팩을 착용한 병사들을 떨쳐 내기 힘들다는 것도.
그래서 티노를 인질로 삼았다. 티노가 단순히 어린 소년이어서 택한 게 아니라 무장을 한 어린 소년이라 택한 거다. 이대로 몸을 빼다가 티노의 백팩과 무기들을 훔쳐 달아날 속셈으로.
“꼼짝 마!”
주춤주춤 물러서던 남자가 흠칫하며 목자재 쪽도, 길 쪽도 아닌 곳을 향해 총을 겨눴다. 한 명이 우회해서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급히 총을 거둬 다시 티노의 이마에 갖다 댔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티노는 알아차렸다. 총의 이음새가 미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저 상태에서 총을 쏘면 십중팔구 폭발한다. 남자도 그걸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안타깝게도 병사들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티노는 알았다. 그게 중요하다.
티노는 남자의 팔뚝을 잡지 않은 손을 천천히 내려서 허리 아래에 비스듬히 찬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어깨 뒤로 단숨에 꽂았다. 동시에 팔뚝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검자루 끝에 포개어 힘주어 눌렀다. 상대의 어깨를 파고들어 뼈에 부딪치는 딱딱한 감각이 손아귀에 생생하게 전해졌다.
“아악!”
남자는 괴성을 지르며 크게 비틀거렸으나 마지막 생명줄을 붙잡듯이 티노를 놓치지는 않았다. 티노 역시 상대가 얌전히 놓아주길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두 손으로 단검을 쥔 채로 허공에 떠 있는 다리를 복근의 힘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반탄력을 이용해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아 남자의 어깨 위를 타 넘었다.
남자의 등으로 몸이 넘어가는 순간 다리를 확 끌어당겨서 한쪽 다리로 어깨를 디딘 뒤 다른 쪽의 무릎을 굽혀 뒷목을 찍었다. 그리곤 단검을 쥔 채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상대를 떨쳐 내며 가볍게 착지했다. 자연히 단검이 뽑혀 나오며 티노의 뺨과 외투에 핏방울이 튀었다.
“이 개자식!”
저가 한 짓은 생각 안 하고 고통과 분노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는 남자의 이마에 기꺼이 총을 갖다 대 주었다. 물론 그것은 매일 점검하여 항상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는 티노의 총이었다. 상황은 그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꺅! 티노!”
그리고 유일하게 티노의 안위만을 걱정해 줄 라디가 뒤늦게 현장에 나타났다.
현상수배범을 포박한 뒤 내내 그와 대화를 나눴던 병사가 티노 쪽으로 다가왔다. 티노는 소란이 가라앉자 원석을 가지고 나타난 직원에게서 통을 받아 수레에 붓고 있었다. 라디는 상처를 대충 지혈한 현상수배범과 땅바닥에 고여 있는 피와 티노의 옷에 튄 핏방울을 번갈아 보느라 정신없었다.
황폐한 자연과 흉포한 몬스터, 잔악한 플로레스라. 적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세상이다. 15살이 되면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고 그것을 통과하지 못하면 영영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라디는 당당한 성인이다. 유혈사태와 정당한 폭력사태에 넋을 잃을 정도로 연약한 소녀가 아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가세된 전투는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그녀는 현상수배범에겐 두려움과 경멸의, 티노에겐 놀람과 감탄의 시선을 번갈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저쪽을 봐도, 이쪽을 봐도 실감이 안 될 때는 바닥에 고인 피를 봤다.
병사가 다가오자 퍼뜩 정신을 차린 라디가 티노를 쿡쿡 찔렀다. 딴에는 그가 오는 걸 알려 주려는 은밀한 신호였지만 누가 봐도 심하게 티가 났고, 심하게 힘이 들어갔다.
“아파, 라디.”
티노는 찔린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그에게 병사가 웃는 낯으로 말을 걸어 왔다.
“난 디나르 가의 사병대 2조 조장, 바인이다. 디나르 가의 물건을 훔친 자를 쫓던 중이었지. 휘말리게 해서 미안하게 됐다.”
“티노입니다. 이쪽은 라디.”
라디는 말없이 꾸벅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어차피 바인의 관심은 티노에게 가 있었다.
“총구가 이마에 닿아 있는데도 거침없이 움직이더군. 배짱이 좋은데?”
“총이 고장 났더라고요.”
티노의 여상스러운 답에 바인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뒤를 보며 손짓했다. 그러자 뒷정리를 하던 다른 병사가 신속하게 달려왔다.
“놈의 총을 가져와라.”
달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달려간 병사가 현상수배범한테서 수거한 물건을 뒤져 총을 꺼내 왔다. 그것을 받아 들고 꼼꼼하게 살펴본 바인은 허, 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 긴박했던 인질극은 대체 뭐였단 말인가? 놈의 허세에 놀아난 꼴이 아닌가? 일이 잘 해결됐으니 망정이지…….
바인은 전보다 더 호감 깃든 얼굴로 티노를 내려다보았다.
“놈이 몰랐다면 총을 쏠 수도 있었다. 그럼 폭발에 휩쓸렸을 텐데.”
티노는 놈이 알고 있었으리라 확신했지만 설명하기 애매해서 넘어갔다.
“배짱뿐만 아니라 눈썰미도 좋군.”
“감사합니다.”
티노는 씩 웃으며 답한 뒤 다 부은 통을 어스듐 교환소 직원에게 돌려줬다. 라디와 마찬가지로 둘의 대화를 노골적으로 구경하고 있던 직원은 찔끔한 얼굴로 그것을 받았다. 수레 안을 본 바인이 의외라는 말투로 물었다.
“공방에서 일하는 건가?”
“예. 원석 가공 공방에서 일해요.”
임시직이라는 말은 생략했다.
“허…….”
옆에서 라디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만약 라디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당장 뭐라고 쏘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티노에게 이번 일이 좋은 기회일지도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나 바인은 군침 도는 제안을 했다.
“실력이 아깝군. 생각이 있으면 디나르 가로 와라. 기꺼이 사병으로 맞아 주지.”
그 제안에 답한 것은 티노가 아니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 바인.”
“……?”
티노와 바인이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상대를 아는 척한 것은 라디였다.
“테이슨 경!”
“안녕, 라디. 공방 밖에서 보는 건 오랜만인 것 같은데?”
라디에게 웃으며 인사한 테이슨은 티노에게 눈으로 인사를 한 뒤 마지막으로 바인을 보았다. 바인은 떨떠름하다 못해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공사다망하신 친위대원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지나가던 길에 이쪽이 유난히 소란스러워 들러 봤네.”
“그러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이미 일은 정리되었으니 가시던 길을 마저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만.”
“그러려 했는데 아는 얼굴이 있어서 말이야.”
그 말에 바인은 라디를 흘낏 보았다. 테이슨을 반갑게 맞은 건 그녀였으니까.
“겸사겸사 인사라도 하고 가시려는 겁니까?”
“그것도 있고. 자네가 티노에게 하는 말을 들으니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더군.”
테이슨은 티노의 옆으로 가서 그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그 모습에 바인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티노는 친위대원이 될 소년이거든.”
“하!”
바인은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터뜨렸다.
“귀족이 아닌 자가 친위대 눈에 차기나 하겠습니까?”
“친위대에 들 수 있는 자격에 귀족이어야 한다는 조항은 없네만.”
“확실히 그런 조항은 없지요. 실례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바인의 얼굴에 점점 더 삐딱해졌다.
“하지만 결국 친위대의 눈에 차지 않아 처리되지 않았습니까?”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선배님은 자랑스럽게 전사하셨다.”
내내 정중했던 테이슨의 기세가 변했다. 티노의 머리에 총을 대고 위협했던 범죄자의 살기 따윈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위대한 친위대원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그런 거겠지요.”
바인의 기세가 꺾였다. 하지만 독기가 빠진 건 아니었다. 그는 티노를 똑바로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친위대를 동경할 만한 나이라는 건 안다. 얼마 안 가 현실을 알게 되겠지.”
그리곤 보다 강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때라도 디나르 가로 와라. 환영하겠다.”
하지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그 뒤의 것인 듯했다.
“이미 현실을 충분히 아는 자가 저리 나오는 것이 나는 이상할 뿐이다.”
주변을 정리하는 바인 등을 뒤로하고 티노와 라디는 뱅커를 몰아 그 난리판을 빠져나왔다. 테이슨도 함께였다. 구경꾼이 몰려 있어서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바인이 수고료라며 준 묵직한 돈주머니를 들고 즐거워하는 티노와는 달리 테이슨은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비교적 한산한 곳까지 오자 라디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테이슨 경?”
“아니, 아니야.”
테이슨은 쓰게 웃었다. 그리곤 티노 쪽을 돌아봤다. 시선을 느낀 티노가 물었다.
“왜요?”
“……사병 제안 받은 거, 끌리지 않니?”
“……?”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이야기를 들은 티노는 눈만 껌벅였다. 옆에서 라디가 테이슨의 말에 공감하며 끼어들었다.
“사병도 나쁘지 않잖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친위대는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인걸.”
“라디의 말이 맞다. 거기다 그자의 말대로 친위대 내에서도 차별이 있어. 선배님도 귀족이기만 했다면…….”
무겁게 말하는 테이슨에게 티노는 농담조로 물었다.
“전에 한 말과는 다른데요?”
“솔직히 말하면, 네 실력을 과소평가해서 가볍게 한 말이었다.”
“테이슨 경은 제가 싸우는 거 못 보셨잖아요?”
“아까 네가 잡은 자는 요즘 한창 악명을 떨치고 있는 도적단의 부대장이다. 방심했다 해도 호락호락 당할 자가 아니지.”
그 말에 라디가 숨을 헉하고 삼켰다. 테이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가볍게 생각했어. 친위대에 들어온다고 그게 끝이 아닌데 말이다.”
“그런 건 사관학교의 입학 조건을 들은 순간부터 알고 있었어요.”
친위대를 배출하는 사관학교가 신분과 재산 등으로 사람을 차별하는데, 거기서 배우고 나온 친위대라고 별수 있겠는가? 환상은 이미 깨진 지 오래다.
“그런데도 친위대에 들어오고 싶은 거니?”
“기대만큼 좋지 않다고 해서 포기하면 여태 꿈꿔 온 시간이 아깝잖아요?”
“하지만…….”
“포기해도 후회가 남지 않을 때까지만 노력해 보려고요.”
“……!”
테이슨은 우뚝 멈춰 서서 티노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조금 늦게 알아차린 티노는 뱅커를 세우고 뒤를 돌아봤다. 라디도 따라서 멈추고 테이슨을 의아하게 봤다.
곧 테이슨은 생각을 떨쳐 내듯 고개를 내젓고 둘 쪽으로 걸어왔다.
“티노, 너…….”
“그런데 친위대와 사병은 원래 사이가 안 좋은가요?”
티노는 그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다는 의도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테이슨의 말을 잘랐다. 테이슨은 뭔가 더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단념하고 질문에 답했다.
“우리는 왕실을 수호하는 존재지만 사병은 귀족들의 병사다. 각자의 임무 때문에 자주 부딪치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 쪽의 급이 높기 때문에 저들이 물러나야 하지. 그래서 우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거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주인에게 깨지니까.”
“그렇군요.”
티노는 예의상 고개를 끄떡이며 답했다. 물어보긴 했으나 크게 궁금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 라디가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티노, 저기가 핀 학원인 것 같아.”
과연 라디가 가리키는 길 끝부분에 핀 학원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무장한 사람들이 빈번하게 드나들고 있는 곳이었다. 둘의 행선지를 모른 채로 같이 걸어왔던 테이슨이 그제야 물었다.
“무예 학원에 등록하려는 거냐?”
“당장은 아니고요. 돈 좀 모이면요.”
그러고 보니 테이슨을 만나면 물어보려던 것이 떠올랐다.
“왕실 예법과 교양과 학식은 어디서 배울 수 있나요?”
“그건 보통 어렸을 때 가정교사를 초빙해서 배우기 때문에…….”
솔직하게 답하던 테이슨은 말끝을 흐렸다. 티노는 개의치 않고 다시 물었다.
“그럼 무예 학원처럼 따로 배울 수 있는 곳은 없는 건가요?”
“무예야 배우면 사병이나 용병이 될 수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으니 찾는 사람이 많지만 왕실 예법은 왕실에 출입하지 않는 자에겐 무의미한 것이라서 말이다.”
“독학도 못 하나요? 가정교사한테 배우든 사관학교에서 배우든 교재는 있을 거 아녜요?”
신승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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