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페이에게 사다 준 목걸이와 팔찌 같은 다양한 선물을 다 합친다면 아마도 군용트럭 한 대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그렇게 거의 2년 치 월급을 모두 페이에게 쏟아부었건만 페이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물론 보내 주는 선물을 족족 다 받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2년이라는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지난 아이딘의 석방 건으로 페이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 듯싶었다. 란돌 대장의 노력과 정성에 페이가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모처럼의 데이트.
란돌은 오늘을 위해 단단히 준비해 왔건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래…… 그래야지.”
란돌 대장 입장에서 미하일 중위는 자기의 직속부하. 게다가 랄프 프린츠 장군의 아들.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모른 척하기에는 여러 복잡한 사항들이 존재했다.
여러 복잡한 계산속에 란돌 대장은 아차 싶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란돌 대장은 아이딘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피크닉부터 랑베르 위원장에 대한 반란군의 습격까지 아이딘은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히 설명했다. 모든 정황을 아이딘에게 듣고 나서는 란돌 대장은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이미 경비대는 자신을 찾으려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페이와 잠깐 바람만 쐬고 들어갈 심산이었는데 이렇게 일이 꼬일 줄은 정말 몰랐다. 란돌 대장은 그제야 부랴부랴 서둘렀다.
그러나 갑작스런 드르륵 하며 울려 퍼지는 기관총 소리에 서로에게 말할 것도 없이 모두가 바닥에 엎드렸다. 쭉 빼입은 경비대 정복이 흙투성이가 되어 란돌 대장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리고는 폭발음. 란돌 대장의 차가 폭음과 함께 바퀴가 하늘로 향한 채 뒤집어졌다.
“뭐지, 이건?”
란돌 대장이 페이와 함께 옆에 있던 바위 뒤편으로 몸을 날린 후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사방을 둘러본다.
저편에 군인 두 명이 보인다. 아마 아이딘을 추적한 반란군인 듯싶었다.
“이런…….”
란돌 대장이 권총을 꺼내 들었다. M92F베레타다. 란돌 대장이 적들을 향해 응사했다. 무능력한 장교라고 항상 구설수에 올랐던 그였지만 적어도 군인의 본분에 있어서는 소문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
란돌 대장의 노련한 사격 솜씨에 적들은 함부로 다가오지 못했다. 서로 몇 번의 총격을 벌였지만 별 소득을 얻지 못한 채 지루한 대치를 벌였다.
아이딘 역시 엎드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잃은 미하일 중위를 간신히 바위 뒤까지 끌어왔을 뿐 자신의 몸 건사하기도 힘들었다.
“아이딘. 적들이 몇 명이지?”
미하일 중위의 목소리다.
“정신이 들었어요?”
“어…… 그래. 적들이 몇 명이야?”
미하일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펴보며 아이딘에게 다시 물었다.
“두 명 정도 되는 거 같아요.”
“그래. 거리는?”
“약 200미터 정도요.”
“그럼 오른쪽 숲 쪽을 조심해. 아마 일부 병력이 그쪽으로 올 거야.”
“네. 알겠어요.”
“너무 의식하지는 마. 그쪽이 우리가 빠져나가기 가장 용이한 길이야. 아마 거기를 지키며 좀 더 지원군이 오길 기다리겠지. 야전 전투 매뉴얼에 있는 전형적인 방식이야.”
“저희도 아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요?”
“아니. 여기 아군이 온다고 해도 너무 늦어. 저 녀석들의 원군이 먼저 도착할 거야.”
차량으로 아이딘과 미하일을 쫓던 반란군의 무리가 떠올랐다.
“그럼 어떡하죠?”
“아마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거야. 그전에 숲 쪽의 녀석들이 한 번은 움직일 거야. 그때 공격하는 거야. 숲 쪽에 있는 녀석만 어떻게든 처치해 봐. 처치 못 해도 좋으니 움츠리게만 해. 그러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란돌 대장님께도 말씀드려.”
“네.”
“그다음에는 페이와 함께 뒤쪽 숲 쪽으로 무조건 뛰어가. 여기서 100미터 정도니까 무사할 확률은 50% 이상일 거야.”
“미하일 중위님은요?”
“나는 여기 있어야지. 괜히 짐만 될 거야. 뭐 죽이기야 하겠어. 하찮은 변두리 경비대원을.”
미하일이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아이딘은 힘없이 누워 있는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왼쪽 얼굴에 페이가 임시로 감아 준 붕대 대용의 화려한 색깔의 스카프가 그의 초췌한 얼굴과 무척 대조적이었다.
‘이 남자 의외로 괜찮은 구석이 있네.’
아이딘은 미하일 중위에게 알 수 없는 강한 유대감을 느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미하일 중위를 꼭 데려가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아이딘은 곧 란돌 대장에게도 미하일의 작전을 설명했다. 란돌 대장이 좀 불만인 듯싶었지만 그만하라는 페이의 눈빛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잠시 후 해가 지기 시작하자 미하일 중위의 말대로 동쪽 숲에 있는 적이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한다. 은폐해 있는 바위의 사각을 피해 사거리를 좁히려는 듯싶었다.
아이딘과 란돌 대장은 애써 모르는 척 전방의 적들만 신경 쓰는 듯 적들이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적이 마침내 아이딘 일행을 쏠 수 있는 사거리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순간, 란돌 대장이 먼저 번개같이 몸을 돌려 권총을 쐈다.
누가 란돌 대장을 무능하다고 했었던가? 란돌 대장이 쏜 두 발의 총알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두 명의 적의 머리에 명중했다. 동시에 란돌 대장이 페이의 손을 잡고 숲으로 달려간다. 아이딘도 그와 동시에 미하일을 어깨에 엎고 힘차게 달려 나간다.
드르륵 하는 기관총 소리가 들렸지만 이들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리고 아이딘 일행은 무사히 숲속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 * *
에바는 알트마이어 연구소의 지하에 있는 닉스의 병동을 찾았다. 닉스 연방의 통령 닉스는 바로 3년 전 오늘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벌써 3년째, 닉스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몇 개의 보안장치를 지난 에바가 닉스가 누워 있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전신캡슐 앞에 섰다. 에바는 마치 관처럼 보이는 이 캡슐이 싫었지만 환자의 절대안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캡슐을 열고 손이라도 한 번 잡아 봤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유리창으로 보이는 잠자는 듯한 닉스의 얼굴에 만족해야만 했다.
“닉스. 오랜만이에요.”
“당신 괜찮은 거죠?”
에바가 마치 연인을 마주한 듯이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 지금 많이 힘드네요. 제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라면…… 당신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잦아드는 에바의 목소리…… 어느덧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닉스가 이렇게 의식 불명이 된 지도 3년. 에바는 너무나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다. 연방 분리 세력 간의 정치적 싸움, 루체 왕국과의 전쟁, 그 외에 수많은 크고 작은 일들이 에바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그 많은 일들의 결론은 모두 에바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모두가 제 잘못이에요. 전 당신으로부터 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이제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녀가 크게 흐느낀다.
벌써 4년 전. 닉스 연방 신기술 연구소 폭발사건으로 드러난 인체 강화 연구의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치부가 드러나면서 닉스는 에바에게 등을 돌렸다. 언제나 따뜻했던 그의 목소리는 차가워졌고 둘만의 시간은 점차 줄어들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변하게 했을까 하는 고민과 함께 수많은 참회와 용서를 비는 시간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닉스의 대답 없는 차가운 침묵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에바는 영원할 것 같았던 자신을 향한 닉스의 밝은 미소를 보고 싶었다. 단지 그 사건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둘의 냉랭한 관계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 끝없이 지속되었다.
에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연구는 재개되었다. 에바에게 이 연구의 종착역에 자신의 진심과 더불어 닉스의 용서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닉스. 그 미래에 대한 걱정을 덜어 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자신이 선택한 이 길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그 운명의 날. 알트마이어 박사는 강화 인간을 자신의 별장까지 운송해 왔다. 고통의 강화 작업 끝에도 이성을 잃지 않은 최초의 강화 인간. 지구의 변화된 환경에 완벽히 적응된 신인류 창조.
인체 강화 연구는 그 결과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선 것이다. 드디어 대재앙 이후 창궐한 질병들에 속수무책인 인간에게 그 모든 질병들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평탄치 않았다. 반복되는 실험 속에 수도 없이 많이 희생된 사람들. 그 희생에 동반된 두려움, 공포 그리고 헤어진 자들의 슬픔까지.
에바가 결단코 그 모든 것들을 외면한 것 아니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없었다. 닉스를 위해, 닉스 연방을 위해, 더 나아가 인류 전체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에바에게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로 남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강화 인간의 폭주, 예상치 못한 우연한 사고의 연속. 그리고 그녀를 끝까지 지켜 준 닉스의 희생과 비극적인 결말.
3년이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어제 저녁의 기억처럼 생생하게 떠오를 뿐이다.
“미안해요, 닉스.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이 길밖에 없네요. 이 길이 맞건 틀리건 간에 저는 끝까지 가고 싶어요.”
에바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닉스의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는다. 불과 60센티미터도 안 되는 거리지만 그 거리가 한없이 멀게만 느껴질 뿐이다.
* * *
“왜 반란군이 돌아가지 않는 거야? 우리를 왜 이렇게 꼭 잡아야만 하는 거야? 이건 뭐 가는 곳마다 반란군 녀석들이야?”
란돌 대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쉬지 않고 미하일 중위에게 쏘아붙인다. 좀 전에도 반란군을 피해 한참을 도망쳐 뛰어온 상황이었다.
“저희가 목표는 아닌 거 같아요.”
“그럼 뭔데?”
“모르겠어요. 뭔가 중요한 걸 찾으려는 거 같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
미하일이 자신의 수첩을 펼친다. 수첩에는 높은 봉우리, 높은 나무, 개천 등 중요지물을 통해 이동한 거리가 꼼꼼하게 그려져 있었다.
“대단한데! 지도 만들어도 되겠어.”
란돌 대장이 감탄해 마지않는다.
“이 동그라미들이 반란군들인데 이동 경로나 저희와 조우시간을 보면 저희를 추적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경로를 보면 구역별로 나누어 무엇인가를 찾는 것 같아요.”
“그래? 대체 뭘 찾는 거지?”
“그건 모르겠어요.”
갑자기 미하일이 엎드린다. 모두가 동시에 바닥에 엎드린다. 능선 밑으로 반란군의 무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지만 나무와 절벽으로 나뉘어 있어 아이딘 일행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들려?”
“아니요. 웅성거리는 것만 들리지 무슨 소리인지는 잘 들리지가 않아서…….”
미하일과 란돌 대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아이딘은 그 상황을 보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미하일 중위에게 말을 건넨다.
“중위님, 반란군이 찾는 물건은 무전기라네요?”
“무전기? 무슨 무전기?”
“모르겠어요. 꽤나 중요하다고 하네요. 못 찾으면 큰일이라면서…….”
“그래…….”
“랑베르 의원 습격이 목적이라는데 나머지는 잘 모르겠어요.”
“야…… 아이딘 너는 정말 귀도 밝구나. 그게 다 들려?”
아이딘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란돌 대장이 손수건 하나를 아이딘에게 건넨다. 아이딘이 의아해하자 손가락으로 코를 가리킨다. 아이딘의 코에서 또다시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이딘은 코피를 닦으며 생각했다. 분명 자신의 능력과 이 코피는 연관이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예측이 되는 것은 능력을 쓰는 것이 자신의 몸에 해가 된다는 것이다. 좀 더 시간이 나면 파악해 봐야겠지만 앞으로 능력을 쓰기 전에는 더 신중하게 판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선 밑의 반란군이 떠나고 나서 일행은 몸을 일으켰다. 미하일 중위가 다시 수첩을 펼쳐 들었다.
“아마 이곳으로 가면 될 것 같아요. 그러면 반란군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아마 반란군들이 이 근방 일대 전 지역을 섹터별로 나누어 수색하는 거 같아요. 저희가 그 틈바구니에 있었고요.”
“그래서?”
란돌 대장이 흥미롭다는 듯이 물어본다.
“이렇게 보면 아래쪽에서 위로 병력들이 올라가는데 위에 있는 뒤쪽 섹터는 아직 수색을 하지 않은 거 같아요. 이쪽으로 저희가 빠르게 이동하면 수색망 밖으로 먼저 벗어날 거 같아요.”
“그래? 그럼 우리 여기서 기다리면 되는 거 아냐? 그럼 자연히 반란군도 물러가지 않겠어?”
“아니요. 제가 봤을 때는 그렇지 않아요. 아마 반란군은 무전기를 찾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아요.”
강성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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