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은?”
“아직요.”
티노는 무기들을 제 방, 제 자리에 넣은 뒤에야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램이 치우고 있는 보존식품을 보고 피식 웃고는 곧장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곱게 빻은 곡물과 우유, 버터 등으로 만든 스프와 건과일을 넣어 구운 팬케이크, 얇게 썬 훈제 햄과 신선한 과일 샐러드 등으로 식탁은 금세 풍성해졌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냐?”
“여기저기요.”
“내일부터는 공방에 출근해라. 이제 성인이니 본격적으로 배워야지.”
“언제는 본격적이 아니었나?”
“그동안은 마음껏 뛰놀게 해 줬잖느냐?”
“뭐가 마음껏이에요? 숙제랑 일이랑 끝내지 않으면 잠도 못 자게 했으면서.”
티노는 사실을 지적하며 코웃음을 쳤지만 램은 굴하지 않았다.
“내가 백팩이나 무기 따위를 못 건드리게 했다면 네가 안전지대 밖으로 나갈 수 있었을 거 같으냐?”
그건 맞는 말이라 티노는 입을 삐쭉였다.
“내일부터 정식 출근하도록 해.”
“어제 막 자유인이 됐는데 바로 정식 출근하고 싶지 않은데요?”
“흥. 성인이 됐으면 이제 제 밥값은 벌어야지.”
“어렸을 때도 충분히 밥값은 하고도 남았다고 생각합니다만?”
“네가 거덜 낸 코어와 폭탄 값이 총 얼만지 아냐?”
“그렇게 나오면 섭섭하죠.”
“섭섭하게 한 김에 마저 말하마. 이제 너도 성인이니 코어나 무기는 네가 구해.”
“안 그래도 지금 제가 갖고 다니는 건 제가 만든 거잖아요?”
“재료값은 누가 대줬는데?”
“……쳇!”
무기를 만들 때 공방의 것을 이용해 왔던 티노는 할 말이 없어 식사만 계속했다. 램은 훗, 웃으며 말했다.
“너한테 시간을 주면 뒤로 무슨 짓을 꾸밀 게 분명한데 자유 시간 따위 줄 수 없지.”
“손자를 못 믿으시는 거예요?”
티노는 섭섭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이래 봬도 전 거짓말한 적 없다고요.”
“네가?”
“그럼요! 여태 제가 할아버지 뒤를 잇겠다거나 공방을 물려받겠다거나, 그런 말 비슷한 거라도 해 본 적 있나요?”
“…….”
그렇게 따지면 맞는 말이다. 램은 흥, 하고 결론만 말했다.
“내일부터 출근해.”
“글쎄요.”
티노는 어느 쪽으로 답하든 램의 경계심을 돋우리란 걸 알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스프를 그릇째 들어 단번에 비우고 벌떡 일어났다.
“그만 잘래요.”
“그래.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직업 전선에 나가려면 힘들 테니 푹 쉬려무나.”
격려하는 척 약을 올리며 램은 티노가 남긴 팬케이크를 자신의 접시로 기꺼이 가져갔다.
방에 불을 끄고 이불을 덮은 채 침대에 누워 있던 티노가 벌떡 일어난 것은 램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 직후였다. 빠르게 그러면서도 조용히 일어난 티노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창문으로 가 아래를 확인했다. 창문은 올라오자마자 열어 뒀다. 나중에 열려 들면 램이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 층 제일 끝에 있는 램의 방에 아직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램이 공방에 있었으면 일이 쉬워졌을 테지만 이렇게 직접 동태를 살피며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얼마 뒤, 램의 방에서 빛이 사라졌다.
티노는 좀 더 기다리다가 다시 살금살금 침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아래서 낡은 트렁크를 꺼냈다. 잡동사니를 담아 두는 용도로 쓰던 것인데 내용물은 미리 비워 뒀다. 램이 눈치 챌 수도 있어서 짐을 싸 두지는 않았다. 옷장을 열어 생각해 뒀던 옷, 속옷, 양말 따위와 여행용 세안도구, 수건, 약 등을 차곡차곡 트렁크에 담았다. 그 다음엔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고 고글을 껴서 이마 위에 올려놓고, 백팩을 메고 총과 단검을 찼다. 마지막으로 남몰래 모아 놓은 돈을 여기저기 나눠서 숨긴 뒤 미리 사 둔 비행선 표를 가슴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곳에 있으면 있을수록 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진다는 걸 램의 손자인 티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오늘, 기초 군사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첫 날에 움직이려는 것이다. 천하의 램이라도 티노가 성인이 되어 돌아온 날 바로 가출…… 아니, 독립을 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램은 안 자려 들면 며칠이고 작업에 몰두할 수 있지만 일단 잠자리에 들면 바로 잠이 드는 편리한 체질이다. 하지만 티노는 신중을 기해 바로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이것까지 계산해서 비행선 표는 새벽 시간 것으로 사 뒀다.
침대에 앉아서 시간이 가길 기다리다가 문득 가슴 안주머니에서 천 뭉치를 꺼냈다. 천을 풀자 티노의 손바닥 반만 한 브로치가 나왔다. 둔탁한 방패 모양 위로 붉은 늑대가 그려져 있는 강철의 브로치. 그림 부분은 심하게 긁혀서 윤곽만 간신히 보일 정도고 아래쪽엔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의 테두리는 강한 화력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조금 그을려 있었다. 티노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다가 다시 천으로 싸서 안주머니에 넣었다.
새삼 흥분과 긴장이 밀려와 두근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꾹 눌러 보았다. 옷 아래로 아직은 낯선 목걸이가 손끝에 닿았다. 아르카가 준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자라 온 마을을 떠나면서 정식으로 작별 인사를 나눈 것은 아르카뿐이라는 게 묘했다. 훨씬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마을 아이들 중 대부분이 기초 군사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들이 마을에 있다 해도 굳이 인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티노를 이해하지 못하고 곧 후회하고 돌아올 거라는 시선을 보낼 게 뻔했다.
어려서는 티노의 꿈에 공감하던 아이들이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존경받는 무기 제작 장인 램의 후계자 자리가 얼마나 탐스러운 자리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다른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티노를 철없는 아이 취급을 해 왔다. 딱히 신경 쓰진 않지만 말이다.
드디어 시간이 됐다. 선착장이 가깝지 않은데 엑시아를 타고 움직일 순 없으니 지금부터 움직여야 시간이 맞는다. 티노는 미리 써 둔 메모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빈 컵을 거꾸로 엎어 놓았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트렁크를 밧줄로 묶어서 창밖으로 놓은 뒤 램의 방 쪽 동태를 살피며 천천히, 천천히 밧줄을 풀어 마당에 내려놓았다. 다음으로 트렁크와 연결된 밧줄 끝을 방문과 침대, 책상에 이어서 묶었다. 그리고 장갑 낀 손으로 밧줄을 붙잡고 내려왔다.
마당에 내려선 뒤로도 한동안 가만히 램의 동태를 살피다가 트렁크의 밧줄을 풀었다. 그리고 벽에 찰싹 붙어서 램의 방 쪽 창에선 보일 수 없는 사각지대로 살금살금 갔다. 사각지대로 들어선 뒤로도 엄폐물 사이사이로 민첩하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램이 일어나 창밖을 본다 해도 볼 수 없는 거리까지 떨어진 뒤, 티노는 백팩의 이동 밸브를 열었다. 그리고 달렸다.
* * *
노블리언의 수도, 레나센시아는 엑서디움 전쟁으로 인해 외곽 지역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중심 지역은 본래 왕성을 비롯한 중요한 기관과 귀족이나 부유한 시민들의 거주지가 있던 곳이라 특히나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오히려 파괴된 외각 지역을 부각시켰다. 거기에다 외각 지역에 거주하던 일반 시민들까지 유입되면서 기존의 화려한 건물과 조잡하게 급조된 건물이 뒤섞여 소란하고 번잡했다. 계획적으로 지었던 도시의 조화는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렇다 해도 레나센시아는 일국의 수도답게 충분히 크고 번화로웠다. 건물의 크기와 그것을 치장하고 있는 장식들, 거리의 규모와 복잡함, 거기에 백팩까지 가동해서 바쁘게 다니는 사람들과 정신없이 오가는 각종 승용물까지……. 이제 막 수도에 상경한 촌뜨기에겐 신기한 볼거리가 되고도 남는 것들이었다.
막 선착장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하는 이 촌뜨기 소년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유행에 한참 뒤쳐진 옷, 이마 위로 올려놓은 둔탁한 고글, 튼튼한 것 외엔 장점이 없어 보이는 부츠, 여기저기 찢어진 곳이 많은 외투에 낡은 트렁크까지. 전쟁으로 흉흉해진 인심을 타고 극성을 부리는 소매치기조차 거들떠도 안 볼 차림이었다.
주위의 화려함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차림새에 주눅이 들 법도 했지만, 또는 간간히 비웃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에 오기가 날 법도 했지만 이 촌뜨기 소년은 태평하게 주변을 감상하기만 했다. 멋진 곳을 볼 때면 감탄을 하기도 하고, 생각보다 별로다 싶은 곳을 볼 때면 신기해하기도 하고.
그러다 드디어 씩씩하게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수도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어디를 갈까 비행선을 타고 며칠을 날아오는 내내 고민했지만 역시나 행선지는 그곳이었다.
국왕이 산다는 왕성도 보고 싶고, 각종 서적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는 도서관도 보고 싶고, 노블리언의 역사를 알 수 있다는 박물관도 보고 싶고, 수도의 무기 제작 공방도 보고 싶지만 그런 건 이제 수도에 왔으니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를 수도로 오게 한 일차적 목표! 역시 제일 처음은 그곳이다!
초라한 차림새의 촌뜨기 소년은 옆을 쌩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당당하게 물었다.
“실례합니다. 사관학교를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죠?”
친위대는 왕실 직속 근위대다. 왕과 왕가를 보호하는 곳이니만큼 그에 걸맞은 자격이 필요하다. 무력은 당연한 것이고 왕실 예법 및 귀족에 준하는 교양, 지식 등을 갖춰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는 곳이 바로 사관학교다.
티노에겐 스승이 필요했다. 잡다한 일을 해 주는 대가로 아르카가 체력을 단련시켜 주며 기초적인 무예를 가르쳐 줬지만 처음부터 고급 무예는 알려 주지 않겠다고 밝혔었다. 애초에 노블리언과 플로레스라는 타고난 신체적 조건이 다르기에 아르카의 무예를 익히는 것은 티노에겐 불가능하기도 했다.
거기다 티노는 무예뿐만 아니라 왕실 예법과 교양, 지식까지 배워야 했는데 그걸 적대 종족인 플로레스라가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티노는 항상 일차적인 목표로 기초 군사 훈련을 마치고 성인으로 인정받기만 하면 사관학교를 가겠노라고 정해 왔다.
사관학교는 다소 외진 곳에 있었다. 파괴되기 전 수도였다 해도 고급 학교치고는 외진 곳에 있었고, 지금은 거의 바깥과 닿아 있는 수준이었다. 몬스터를 생포해서 훈련용으로 쓰는 사관학교를 상위 계층 문화의 중심지 한복판에 넣기는 싫고, 친위대를 육성하는 곳을 외각에 넣기도 싫어 정해진 위치였다.
물어물어 사관학교 앞에 당도한 티노는 정문에 떡하니 서서 한 차례 둘러보았다. 건물 내부와 구성 그리고 훈련소 등을 외부에서 볼 수 없도록 지어져 있어서 딱히 볼 만한 건 없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봤던 수도의 다른 건물들에 비하면 작은 감이 있었지만 빈틈없는 느낌의 건물이었다.
“어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여긴 사관학교라고.”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자 뱅커를 탄 세 사람이 티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중 둘은 소년이고 하나는 소녀였다. 셋 다 티노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숨길 게 없는 티노는 어깨를 으쓱이곤 답했다.
“사관학교인 건 나도 알아. 입학하려고.”
“오? 입학 희망자? 우리도 그런데.”
처음 말을 걸어 왔던 갈색머리 소년이 그리 말하며 티노를 위아래로 뜯어보곤 피식 웃었다. 그의 태도는 티노의 부모님이 안 계신 것을 걸고넘어지며 의기양양해하던 빌의 꼬락서니와 비슷했다. 그리고 빌에게도 그랬듯이 티노는 저 소년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 쪽은 아니었던 듯 재차 질문을 던졌다.
“어디 소속이냐?”
신승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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