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겨우 대화할 자세가 된 것 같네. 그럼 묻겠다, 네놈들이 가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차용증 어디 있어?”
“그, 그건 왜……!”
빠드득!
“아아악…… 아파, 제발 그만해!”
빠득!
“후웁…… 후우웁……!”
“이제 열다섯 번 남았다.”
아이딘은 엉망이 된 헥터의 왼손을 던져 버리고 오른손을 잡아끌었다.
“다시 묻는다. 차용증 어디 있어?”
“의, 의자…… 의자 밑에……저기…….”
헥터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와 몸짓으로 겨우 대답했다. 아이딘은 창고 끝에 놓여 있는 목조 의자로 다가가서는 발로 의자를 걷어찼다.
쾅!
의자가 지면에서 붕 하고 날아가 벽에 부딪혀 박살났다. 의자가 치워진 카펫을 들춰 보니 철로 된 금고가 드러났다. 아이딘이 금고를 열자 두꺼운 장부 뭉치들과 크리-대재앙 이후 루체 왕국과 닉스 연방 공화국에서 통용되는 돈의 단위- 한 주머니가 보였다.
‘이거야.’
아이딘은 금고에 있는 서류와 장부를 꺼내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얼핏 봐도 수십 장은 넘을 듯한 차용증에 잡다한 문서들 그리고 모든 금전거래 내용이 적혀 있는 회계장부까지 헥터의 모든 것들이 여기 담겨 있었다.
이리저리 차용증을 들춰 보던 아이딘은 레이나의 차용증을 찾아내고는 바로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 순간 헥터는 조심조심 아이딘의 눈치를 피해 탁자 밑에 떨어진 자신의 권총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저 총만 어떻게든 잡으면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을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 나갔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헛된 망상이었다.
아이딘은 뒤도 돌지 않고 의자를 발로 차 헥터의 얼굴로 날려 버렸다.
빠악!
“으악!”
헥터는 총 근처도 가기 전에 아이딘이 던진 의자에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고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아이딘은 돌에 맞은 개구리처럼 널브러진 헥터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금고 안에 있는 모든 서류를 챙겨 옆에 있는 행낭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등 뒤로 짊어졌다.
“어디 보자.”
아이딘이 창고 안을 휙 둘러보았다. 기절한 녀석들을 포박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저거 좋네.”
창고 안엔 목재를 묶으려 했는지 제법 많은 밧줄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아이딘이 그 밧줄을 가지고 와서 기절한 헥터 패거리들을 꼼짝할 수 없도록 꽁꽁 묶었다. 그리고는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에 넋이 나간 듯이 멍하니 서 있는 레이나에게 옆에 있던 옷가지 하나를 건네준다. 그러나 아이딘의 잔인한 모습을 지켜본 레이나는 겁에 질려 한 걸음 물러선다.
“어서 가죠.”
아이딘이 방긋 웃는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레이나가 혼란스러워한다.
“미쉘이 엄마를 찾고 있어요.”
그제야 레이나가 아이딘에게 다가선다.
* * *
아이딘이 레이나와 함께 퍼플 하스피탈로 돌아왔다. 가게 한구석에서 예리엘과 잭슨이 미쉘을 돌보고 있었다.
“엄마!”
미쉘이 레이나를 보자마자 순간 기뻐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뭔가 무척 망설이는 모습이다.
“미쉘. 엄마 찾아왔는데 안 기뻐?”
예리엘이 어서 엄마에게 달려 나가라는 듯 미쉘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기뻐.”
미쉘은 멈칫하면서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미쉘을 바라보는 레이나의 표정 역시 그리 밝지는 못했다.
“미쉘, 어서…… 네가 찾던 엄마잖아?”
참견쟁이 잭슨이 끼어든다. 그러자 미쉘이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또 엄마는 나를 두고 갈 거잖아.”
“미쉘 미안해.”
레이나가 달려와 미쉘을 꼭 안아 준다.
“엄마가 아빠처럼 나를 버리고 갈까 봐 얼마나 무서웠다고…….”
“걱정하지 마, 꼬마 미쉘. 이제 엄마는 다른 데 안 가고 미쉘하고 같이 있을 거야.”
“정말? 정말인 거지!”
미쉘이 엄마 품을 벗어나 신나게 소리쳐 외친다.
“그래. 이제 엄마는 미쉘과 항상 같이 있을 거야, 항상…….”
순간 레이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엄마 정말인 거지? 정말이야?”
레이나가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와. 신난다……!”
미쉘은 너무나 좋은지 자리에서 펄쩍펄쩍 뛴다.
“저기 아이딘…….”
“응?”
예리엘이 아이딘에게 다가와서 그의 코를 가리킨다.
“코피가…….”
“어? 이런…….”
아이딘은 예리엘이 건네준 휴지로 코를 닦는다. 휴지가 피로 흥건하게 젖어든다.
“헥터와 싸우다가 한 대 맞은 거야? 그놈이 쉬운 상대가 아니긴 하지. 그래도 그게 어디야.”
잭슨이 안쓰러운 듯이 말을 건넨다. 아이딘 역시 헥터 패거리와의 싸움을 생각해 봤지만 코피가 터질 이유는 전혀 없었다. 헥터 패거리들이 아이딘 근처에도 오지 못하고 끝나 버린 너무나 일방적인 싸움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딘도 이 코피의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단지 예리엘이 건네주는 휴지로 연신 코를 닦아 내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레이나와 미쉘도 걱정이 되는 듯 아이딘만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괜찮아. 그냥 피곤해서 그런 것 같아.”
연신 코를 닦으며 아이딘이 말한다.
“그리고 호퍼, 이것 좀 처리해 줘.”
“뭔데?”
“보면 알 거야.”
아이딘은 등에 짊어진 행낭 주머니를 호퍼에게 건네주었다. 호퍼는 묵직한 행낭 주머니를 열어 보고는 깜짝 놀란다.
* * *
헥터는 꿈꾸듯 몽롱한 기분으로 두 눈을 떴다. 얼굴과 손에서 여전히 고통이 느껴졌다.
“크으으…… 뭐야……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겨우 정신을 차린 헥터는 주변을 둘러보고서 턱이 빠져라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아이딘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은 터라 이미 반쯤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창고 앞 벌판에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단단히 포박되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주변으로는 횃불과 랜턴을 든 마을 사람들이 삽자루와 도끼 등 무기가 될 만한 다양한 연장들을 들고서 둥글게 서 있었다.
“너희들 뭐 하자는 거야? 나한테 이러고도 괜찮을 것 같아?”
헥터는 이번에도 사태 파악을 못하고 두 눈을 부라렸다. 마을 사람들이 헥터의 엄포에 잠깐 움찔하긴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헥터의 눈에 낯익은 얼굴들이 몇몇 보였다.
“날 풀어 주면 너희가 진 빚의 이자를 50%씩 깎아 주지. 음…… 아니지, 안 받아도 되니까 어서 날 풀어 줘!”
그 순간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린다. 그들의 웃음소리에 당황한 헥터의 앞으로 두 덩치 잭슨과 호퍼가 나섰다.
“빚? 무슨 빚? 더 이상 사람들이 갚아야 할 빚은 없는 걸로 아는데?”
잭슨은 헥터를 놀리듯 말하며 유난히 활활 불타고 있는 드럼통을 가리켰다. 드럼통 안의 물체가 무엇인지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씨구, 잘 탄다.”
참견쟁이 잭슨이 깐죽거리며 참견한다.
“마지막으로 잘 봐 둬라. 이 마을에 다시는 발도 못 붙이게 해 줄 테니.”
성급한 마을 사람 하나가 발로 망연자실한 헥터의 턱을 냅다 걷어찼다.
“컥!”
헥터의 비명소리를 신호 삼아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헥터 패거리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하바로프 루디안의 외곽 산속.
마을에서 쫓겨난 헥터와 그의 일당들이 모닥불 하나에 의지한 채 밤을 보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젠장!”
헥터가 사나운 얼굴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헥터의 수하들이 잔뜩 움츠러들며 헥터의 눈치를 살피는 데 급급하다.
노만 마을에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맨몸으로 내쫓긴 지 어느덧 나흘째가 되었다. 보통 범죄자를 마을에서 쫓아낼 때 던져 주는 사흘치의 식량이 바닥난 지도 벌써 하루가 지난 지금, 갈 곳도 머물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토록 뒷돈을 받아먹던 경비대원들조차 입을 싹 닦고서 모른 척했다. 특히 경비대장인 란돌은 자신을 만나 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의리 없는 놈에게 찬조금 형태로 갖다 바친 돈이 적지 않았는데 아예 모른 척하다니. 그러나 경비대원 놈들에게 꾸준히 상납하던 장부까지 모두 그 아이딘이라는 놈이 모조리 태워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으니 그들 또한 헥터 패거리를 도와줄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지극히 계산적인 란돌이 상황파악을 했다면 절대 자기 편을 들어 줄 리가 없었다.
말 그대로 갈 곳 없는 거지 신세였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빼앗은 벌목소도 다시 돌려주게 되고 얼마 전에 마련한 자동차마저 완전히 박살난 채 빈털터리로 쫓겨나고 말았다. 하지만 노만 마을의 어느 누구도 헥터 패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애당초 도와줄 것이란 기대를 갖지도 않았다. 살아서 나온 것만으로도 그저 감지덕지였다.
새로운 거처를 찾아야 했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어영부영 주변을 맴돌다 보니 벌써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마을을 벗어난 폐허 속에서의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함께 쫓겨난 부하 녀석들 또한 헥터와 같이 한두 군데 이상은 골절상을 입어서 이동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밀려오는 배고픔과 상처의 통증이 잠까지 이루지 못하게 하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절대, 절대 이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각오를 굳게 다지는 헥터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붕대로 칭칭 동여매진 왼손이 보였다. 제대로 된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부랴부랴 도망치듯 마을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뼈를 확실히 맞출 수도 없었다. 그의 수하들이 뼈라도 제자리를 잡게 하겠다고 몇 번 건드렸다가 심한 통증을 느낀 헥터에게 얻어터지기만 했을 뿐이었다.
결국 헥터의 왼손은 기이한 모양으로 뒤틀린 채 시퍼렇게 멍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 상태로 두었다가는 왼손을 다시는 사용하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장 오늘밤을 넘기는 것이 급선무였다.
헥터는 욱신거리는 왼손의 통증을 참아 내며 억지로라도 눈을 감았다. 내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 둬야만 했다. 그런데…….
스스스…….
전방의 숲에서 풀잎이 무언가에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헥터뿐만이 아니라 그의 수하 모두가 똑같이 소리를 들었다.
헥터가 반쯤 눕히려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수하들도 다 같이 눈을 크게 뜨고서 소리가 난 쪽을 주시했다.
‘노만 마을 녀석들인가? 아니면 들짐승인가?’
어느 쪽이든 간에 반가운 상대는 아니다. 자신을 아예 끝장내려고 따라온 노만 마을의 녀석들이건 들짐승이건 간에 지금 이 상태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헥터는 엄습하는 두려움을 꾸욱 누르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스스스스!
이제는 풀숲이 흔들리는 게 확연히 보였다.
잠시 후 그 속에서 사람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나마 안심은 되었다. 적어도 짐승은 아닌 사람이니 말이다.
“뭐야, 저놈은?”
헥터 패거리의 눈에 서서히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적어도 노만 마을 토박이는 아닌 것 같았다. 어디서도 만나 본 적이 없는 무표정한 낯선 얼굴. 게다가 추레한 행색에 넝마 같은 옷을 걸쳤고 얼굴엔 땟자국이 가득했다.
그 녀석은 초점 없이 멍한 눈빛으로 헥터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왠지 모르게 오싹했으나 헥터도 지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헥터와 눈이 마주친 그 녀석이 갑자기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며 히죽 웃었다.
“이거 미친놈 아니야?”
강성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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