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탈리퍼 16화

2019-07-15 16:48
메탈리퍼 16화
[데일리게임] 1년 전 교통사고로 이자벨의 엄마와 언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이자벨 역시 큰 부상을 당했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몇 개월간의 집중치료로 이자벨의 상처는 아물었으나 엄마를 잃은 아이의 마음은 아물지 못했다. 심한 거식증과 더불어 찾아온 실어증. 이자벨은 엄마 없는 세상과의 영원한 단절을 선택한 듯싶다.

루드는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의 실수인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솟아올랐다. 닉스 연방의 중앙관료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고 또 마지막 한 사람이 그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며 온다. 그동안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아무런 보람도 없이 딸마저 또다시 그를 떠나려 한다. 이제 그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또다시 슬픔에 빠져든다.

이자벨이 정상적인 식사를 포기한 지 벌써 넉 달째. 몇 차례의 강제적인 식사도 포기하고 이제는 링거로만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의사들도 모두 치료를 포기했다. 신체적 병이 아닌 마음의 병인 이상 의사의 치유도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이자벨을 진찰했던 수많은 의사들 모두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위로의 말만 건넬 뿐이었다.

루드 역시 이제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이자벨이 완쾌되면 함께 살기 위해 지었던 이 집에서 이제 이자벨과의 이별의 시간을 준비하려 한다.

초점 없는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이자벨의 눈이 깜빡깜빡 감겨 온다.

“그래, 졸린 모양이구나. 들어가자.”

루드가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밀었다. 이자벨은 반쯤 감긴 눈을 힘없이 끔벅거렸다. 그러더니 휠체어가 현관에 다다르기도 전에 깊은 잠에 빠져든다.

루드는 잠시 현관 앞에 멈춰 서서 그런 이자벨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가엾은 것. 아빠가 늘 함께할 테니 걱정하지 마렴.’

“흐흐흑.”

전직 닉스 연방 행정부 고위 의원 및 금융통화 위원장 루드 랑베르. 재정관료로서 닉스 연방 경제구조의 초석을 다듬어 대재앙 이후 붕괴된 경제구도를 재편한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딸아이 앞에서는 한낱 힘없는 아버지일 수밖에 없었다.

* * *

“오늘은 웬일이지? 이 녀석들이?”

아이딘이 시계를 바라보며 말한다.

“네, 그러게요.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요?”

예리엘이 의아스럽다는 듯 답변한다.

오전 10시 30분. 그날 이후 매일 아침 성실히 가게로 출근하던 그 두 덩치가 오늘 아침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씩 늦을 때도 있지만 아이딘의 눈치를 보며 9시까지 항상 나타나던 그 녀석들이 오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잭슨과 호퍼가 원샷에 고용이 된 것도 아니고 급여를 주거나 딱히 다른 보상-예리엘이 밥 차려 주는 것을 제외한-을 주는 것도 아니기에 그들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막상 매일 보던 그들이 보이지 않자 허전한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녀석들이 없으면 하루가 무료해질 것을 걱정한 아이딘이 그들을 찾아 나서려 한다.

두 녀석이 갈 곳이야 이제는 뻔하다. 퍼플 하스피탈에서 이른 시간부터 왔다고 페이에게 핀잔을 듣고 있거나 아니면 체육관에서 동네 애들이랑 운동이나 하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이딘이 라이프 체커를 찾아 들고는 슬슬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덩치 둘이 문을 열고 들어선다. 예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었지만 무슨 일인지 호퍼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아이딘과 두 덩치가 작업대에 모여 앉아 횡설수설 한참을 떠들었던 호퍼의 말들을 하나하나 정리한다.

“그러니까 네가 록트리온에 놀러갔다가 한 여자한테 푹 빠진 거라 이거지?”

록트리온은 노만 마을에서 차량으로 두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였다. 규모로 따진다면 인구수 2천여 명의 루디안에 비해 5배 이상의 규모인 1만1천 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 특히 하바로프의 주된 산물인 목재와 석재의 도매상들이 많이 있어 하바로프의 핵심 상업 지역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응…… 그래.”

호퍼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너 완전히 그 여자한테 빠진 거냐?”

“어…….”

“사실 호퍼가 며칠 전부터 그 아가씨 생각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어.”

참견쟁이 잭슨이 거든다.

“그리고 그 여자는?”

“…….”

호퍼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좋아. 그런데 그 여자의 아버지가 병에 걸렸는데 치료비가 엄청나게 들어서 돈을 어디서 빌렸다. 그런데 돈을 빌린 곳에서 돈을 못 갚았다며 그녀를 협박한다. 이거지?”

“어…….”

호퍼가 힘없이 대답한다.

“그래, 빌린 돈이 얼마나 된다는데?”

“2만 크리…….”

“그렇게 많았어?! 뭐 어지간한 사람 1년 치 급여네.”

잭슨이 깜짝 놀란다. 아이딘의 머릿속에 대략의 상황들이 서서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혹시 그 여자는 처음 술집에서 만난 거고?”

“…….”

대답 없이 호퍼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그 여자가 돈을 안 갚게 되면?”

“아…… 그게 그냥 큰일이 난다고만…….”

“무슨 큰일?”

“거기까지는 나도 잘…….”

“그 여자는 어디 있는데?”

“그 녀석들이 돈을 가져오기 전까지는 절대 만날 수 없대. 꼭꼭 숨겨 버렸어.”

“이거 뭐, 삼류소설도 아니고 너무 뻔한 스토리잖아.”

“좀 그런 구석이 있네.”

잭슨이 또 참견한다.

아이딘은 어이가 없었다. 아마도 호퍼 이 녀석이 어느 꽃뱀에게 제대로 걸려들었나 보다. 좀 거칠고 무식하지만 나름 여리고 순진한 면이 있던 호퍼가 완전히 놀아난 거 같았다.

“린만 생각하면 걱정이 돼서 아무것도 못하겠어.”

호퍼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렇게 어리석긴. 다 속임수라니까!”

“아니야. 린은 정말 곤경에 빠져 있는 거야. 내가 안 도와주면 린이 정말 잘못될 수도 있어.”

“넌 바보냐? 그 여자도 그 녀석들하고 한패라니까?”

아이딘과 잭슨이 이구동성으로 호퍼를 설득한다. 호퍼가 못 참겠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아니야, 린은 절대 그럴 리 없어! 그녀는 천사 같은 여자라니까. 날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아이딘은 기가 찼다. 호퍼가 그 여자에게 단단히 빠진 모양이다. 자신의 모습을 보면 그 어떤 여자도 그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텐데 아마 호퍼 녀석은 절대 거울도 보지 않나 보다.

“진정하고. 그래 그럼 그 여자. 그래, 린이라고 했지. 린에게 돈을 빌려 주고 협박하는 녀석들은 어떤 녀석들인데?”

일어선 호퍼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히며 아이딘이 물어본다. 호퍼가 축 처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게…… ‘야쿠자’라는 이름의 조직인데, 대재앙 이전에 일본이라는 국가에서부터 유래된 조직이라고 하네.”

“어 그래, 들어 본 적 있어.”

오랜만에 들어본 야쿠자라는 단어가 과거의 기억을 새삼스럽게 한다.

“그래. 그럼 그 녀석들 규모가 좀 되겠네. 나름 역사와 전통을 가진 조직이니 말이야.”

“닉스 연방의 각 연방국마다 크고 작은 야쿠자 조직이 흩어져 있다고 보면 되지. 도박으로 꽤나 돈을 벌고 있지. 뭐 대출업도 좀 하고.”

“도박?”

아이딘이 의아해한다.

“대재앙 이후 반 토막 난 땅덩어리에서 미래도 불확실하다 보니 도박이 판칠 수밖에. 그런데 그 야쿠자 조직이 많은 수의 도박판을 직접 장악하고 있고 그 규모가 무시 못 할 정도야.”

잭슨의 설명이 이어진다.

“노만이야 비교적 작은 마을이고 헥터 녀석이 있어 야쿠자 조직이 없었지만 우리처럼 조직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녀석들이 이 작은 마을에도 꽤나 있을 거야.”

아이딘이 흥미를 느끼고 잭슨 쪽으로 자리를 고쳐 앉았다.

“너희도 야쿠자 조직에 들어가려 했다고?”

“사실…… 우리도 야쿠자 조직에 들어가려고 야쿠자 학원에도 몇 개월 다녔지.”

“뭐? 무슨 야쿠자 학원이 있어?”

“뭐 일반 학원 같은 것은 아니고 컴뱃 아카데미처럼 서바이벌 스킬 같은 것을 가르치는 곳이야. 대재앙 이후 믿을 건 자기 자신밖에 없다 보니 이런 학교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지. 야쿠자 학교는 무술이나 검을 사용하는 기술들이 유명하지.”

“그럼 혹시 마피아도?”

“그렇고말고. 거기는 아무래도 사격스킬 중심으로 가르치지.”

대재앙 이후 무너진 사회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일으켜 세우는 데 있어 이전에 범죄 집단으로 치부되던 이들의 힘은 필연적이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군인, 경찰과 같은 공권력의 힘은 사회 전반에 대한 시스템 붕괴와 함께 그 위력을 상실했다. 살아남기 위해 극단의 행동까지 필요한 상상 이상의 재해 앞에서는 그들의 봉사와 희생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죽음을 항상 눈앞에 두고 살아온 이런 어둠의 세력들의 활약이 더욱 빛을 발했다.

수많은 요인 구출과 피해를 줄이기 위한 파괴 작업, 제어되지 않는 세력들과의 전투 등 결단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수많은 조직원들의 맹활약은 대재앙 이전에 보여 주었던 그들의 이기적인 행동과는 정반대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활약은 대재앙 이후 충분한 보상이 뒤따르게 되었다. 모두와 대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인정받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아이딘으로서는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 쉽게 이해가 되는 측면도 있었다. 어차피 대재앙은 기존의 사회, 경제, 정치 등 모든 시스템을 근본부터 흔들어 놓았는데 이 정도쯤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런 생각은 차치하고 다시 호퍼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 호퍼. 너는 이제 어떻게 하려고?”

쭈뼛쭈뼛하며 호퍼가 말을 한다.

“그게 음…… 아직 잘 모르겠어. 그저 걱정만 될 뿐이라서. 열흘 정도 시간이 남았으니 좀 더 생각해 보려고.”

고개를 푹 숙인 호퍼의 얼굴을 아이딘이 슬쩍 쳐다보았다. 녀석의 절실함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났다. 뻔한 사기극에 빠진 호퍼가 한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저런 순진한 녀석을 갖고 노는 야쿠자 조직이 더 괘씸했다. 그렇다고 당장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냥 풀이 죽은 호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줄 뿐이다.

* * *

그날 오후 아이딘은 시장에 다녀오기로 했다. 이전에는 두 덩치 녀석과 함께했는데 오늘은 혼자다. 시무룩한 호퍼를 데리고 장을 보기에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혼자 문을 나섰다.

잭슨이 선물한 라이프 체커를 허리에 차고 예리엘이 적어 준 메모를 윗주머니에 단단히 챙겨 넣고 길을 나섰다. 별일 없이 시장에 도착했건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예리엘이 사 오라고 시킨 물건들이 가는 상점마다 모두 동이 났다는 것이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봐도 모든 물건이 팔렸다는 말뿐이다.

“아이참, 이거 큰일인데…….”

혼잣말을 하던 아이딘은 예리엘의 실망하는 얼굴이 떠오르자 발걸음이 더욱 급해졌다. 몇 군데의 가게를 더 들러 보았지만 모두 물건이 팔렸다는 똑같은 말뿐이었다. 답답해진 아이딘이 마지막으로 들른 상점 주인에게 물었다.

“아니, 무슨 일이 있나요? 왜 시장에 물건이 하나도 없어요?”

“아. 이번에 노만 마을에 새로 이사 오신 루드 의원님이 마을 정착을 기념해서 대규모 파티를 여신다고 그 집에서 오늘 시장에 나온 물건들을 깡그리 가지고 가셨지 아마?”

“루드 의원이요?”

“아주 훌륭하신 분이야. 중앙정부에서 큰일을 많이 하셨는데 따님이 갑자기 편찮아지셔서 요양 차 이곳에 오셨다던데?”

주변에 있는 또 다른 상인이 거든다.

“주택지구에 새롭게 지어진 큰 집이 바로 루드 의원 댁이지. 노만에 그런 큰 건물이 들어선 것이 아마 처음일걸.”

아이딘은 며칠 전 봤던 커다란 저택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런데 아이가 열여덟 살도 아직 못 되었는데 오늘내일한다더군.”

“그래, 정말 안되었어. 그 애 엄마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저렇게 되었다네.”

물건도 다 팔렸겠다, 할 일 없는 상인들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아이가 아픈데 무슨 파티야?”

“말이 파티지. 사실 마을에 배고픈 사람들이랑 노약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무상급식 같은 거야. 그냥 파티라고 보기 좋게 부르는 거지. 돌아가신 루드 의원의 사모님이 매달 그런 파티를 하셨다는군.”

“루드 의원님의 사모님도 유명한 과학자셨는데 정말 아깝지.”

“쯧쯧, 암튼 여러모로 루드 의원님은 훌륭하신 분이야.”

“맞아, 맞아.”

아이딘은 상인들의 끝없이 이어지는 수다를 한동안 듣다가 빈손으로 털레털레 마을로 향했다.

마을로 걸어가면서 문득 호퍼의 일이 생각났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 어깨가 축 처져 풀이 죽은 호퍼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부터 났지만 이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쌍한 그 녀석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주택지구를 모두 지나 주택지구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루드 의원의 저택 앞까지 이르렀다. 높고 튼튼한 외벽 그리고 외벽에서 이어지는 개폐식형 돔은 플레이그 스톰을 대비한 대재앙 이후 새롭게 지어지는 건축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강성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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